초심자도 쉽게 가꾸는 건뇌식품 ‘완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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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심자도 쉽게 가꾸는 건뇌식품 ‘완두’
  • 월간원예
  • 승인 2018.06.28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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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적부터 이른 봄 풋완두를 즐겨먹었던 터라 겨울 가기를 기다렸다, 시장에 처음 나온 완두를 사다먹곤 했다. 가끔은 누나네와 옆 밭 할머니에게서 얻어다 먹기도 했으나 성이 차지 않아 실컷 먹어 보려고 자주색 완두 한 홉을 사다 심었다. 완두에는 흰 것과 자주색이 있으나 요즈음 색깔 식품이 매스컴에 오르내려 기왕이면 자주색을 택했다.
수십 가지의 작물 중에서 재배가 쉬워 초심자에게도 수확의 재미를 흠뻑 안겨주는 것이 완두, 양파, 참외, 고구마 등이다. 
완두는 서리 내리는 가을에 심어두면 조금씩 자라다가 겨울을 이기고 봄 일찍부터 부쩍부쩍 자라 오른다. 농약을 뿌리거나 풀 뽑을 필요도 없고 군데군데 나뭇가지만 꽂아주면 줄줄이 매달린다. 생육 중 해줄 일이 별로 없어 늦봄부터 알맞게 익은 것을 부지런히 따다먹으면 봄날은 잘도 간다. 
고소하고 포근포근한 완두는 어린이, 어른 할 것 없이 먹고 또 먹어도 물리지 않아 군것질 거리로 이만한 것도 없다. 잘 익은 완두는 여러 가지 요리에도 들어가지만 뭐니 뭐니 해도 완두 맛은 풋완두가 제일이다. 풋완두를 넣은 밥은 맛있다. 새봄이 와 봄기운이 충만하여 만물이 생동할 즈음 흰쌀밥에 파랗게 박혀 있는 풋완두밥은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돈다.
완두는 다른 콩과 달리 탄수화물, 단백질, 비타민 등의 영양가와 약효가 풍부하다. 자주 먹으면 췌장을 바로 잡고, 당뇨로 오는 갈증과 이뇨에도 좋고 구역질과 여드름도 줄인다. 특히 두뇌활동에 활기를 주는 비타민-B₁이 많아 학생이나 정신 노동자들에게 좋은 식품이다. 이러한 완두에도 소량의 청산이 들어 있어 하루에 40g 이상 먹어서는 안 된다.

건뇌식품 완두 가꾸기
완두는 콩 중에서도 서늘한 기후를 가장 좋아하고 추위에도 강해 남부 지방에서는 노지에서도 월동이 가능하다. 이용 형태는 풋꼬투리, 풋완두, 완숙콩의 세 가지가 있는데 이용 부위에 따라 기능이 각기 다르다. 
덜 익은 꼬투리에는 베타카로틴과 비타민 A와 C, 풋 완두에는 단백질과 비타민 군, 완숙콩에는 아미노산이 풍부하다.
완두의 생육적온은 15~20℃로 저온 작물이지만, 초봄의 5℃ 이하의 저온이나 늦봄의 20℃ 이상의 고온이 계속되면 개화 결실에 지장이 있다. 생육 초기부터 추위에 강해서 한겨울 어린 싹은 영하 4~7℃의 저온에도 견뎌낸다. 
중부 지방에서는 봄 재배, 남부 지방에서는 가을 재배를 주로 한다. 풋완두의 조기 출하를 위하여 11월 중하순에 심어 다음해 3월에 수확하는 가온 하우스재배도 있다. 남부지방에서 11월 중순에 하우스에 심으면 5월 상순부터 따 먹을 수 있고, 노지에 심으면 5월 하순경 밑에서부터 익어간다.
완두는 다른 콩과 같이 질소 보다 인산 및 칼리의 효과가 크다. 콩 전용 복합비료를 주면 간편하나, 성분별로 주려면 10a당 요소 9㎏, 용성인비 50㎏, 염화가리 17㎏, 석회 50~ 100kg이 들어간다. 요소의 60~70%, 칼리의 70%는 밑거름으로 주고, 나머지는 파종 1개월 후 웃거름으로 주는 것이 원칙이나 번거로우면 모두 밑거름으로 넣어도 수량에는 큰 차이가 없다. 
텃밭에 조금 심을 때는 평당 퇴비 5㎏, 복합비료 0.2~0.3㎏, 석회 0.25㎏을 뿌려 심는다. 5평만 심어도 한 가족의 풋콩과 익은 콩으로 먹을 양이 나온다. 완두는 연작장해가 심해 4~5년 간격으로 윤작을 한다. 완두도 다른 콩과 같이 뿌리에서 공중질소를 고정하므로 질소비료를 많이 주면 쓰러져 소출이 준다.
토질은 배수가 양호한 질참흙 또는 참흙이 적당하고 산성이 강하면 생육이 부진하여 약산성으로 교정해준다. 알맞은 토양산도는 pH 6.5~6.8이다. 비가 오면 물이 고인 곳에서는 뿌리와 꼬투리가 썩는다. 농가에서는 미리 두둑을 높이고 골을 깊이 쳐 배수에 대비한다.
남부 지방에서는 봄가을 두 차례 가꿀 수 있으나, 가을심기가 50% 정도 많이 열린다. 중부 지방에서는 날씨가 풀리면 토양 수분이 남아 있을 때 빨리 심지 않으면 수확 전 장마로 손실을 본다. 이랑 너비 120cm에 30cm의 골을 내고 높은 두둑을 지어 두 줄로 포기 사이 25~30cm로 한 구멍에 2~3개씩 점파한다. 
가을파종의 경우 남부 지방에서는 11월 중순, 중부 지방의 봄 파종은 4월 하순이 파종 적기이다. 비닐을 씌워 심거나 짚을 덮어주면 훨씬 잘 자란다. 노지 월동이 불가능한 중지방부에서는 하우스가 아니면 가을 재배는 불가능하다. 
남부 지방에서 가을 파종이 빨라 어린모가 너무 크면 동해를 입기 쉽다. 모가 15~20cm 정도 자란 상태에서 겨울을 보낸 것이 좋다. 그렇다고 좀 늦어 싹이 다 올라오기 전에 추위를 만나도 소출이 준다.
완두의 덩굴유인은 농가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지만 노끈이나 망으로 유인해주기도 하고 텃밭에 조금 심을 때는 1m 길이의 나뭇가지를 촘촘히 꽂아준다. 노지에 심은 완두는 생육기간 내내 기온이 낮아 잡초와 병충해 걱정은 안 해도 된다. 그러나 하우스에 심은 것은 2월 상순에 곰팡이와 진딧물이 발생하므로 한 차례 농약 방제가 필요하다.
초여름까지 풋완두를 즐기고 줄기가 누렇게 마르면 베어 말려 콩처럼 턴다. 완두는 잘 말려서 실온에 저장해두어도 한 달이 채 못 가 속에서 벌레가 생겨 피해가 크다. 완두 저장법에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 말려서 냉장고에 넣거나, 쪄서 실온에 두는 방법이 있으나, 가장 간편한 것은 잘 말려서 뚜껑이 꼭 맞는 용기나 비닐봉지에 담아 공기 접촉을 차단시키면 괜찮다.

멘델과 완두
어릴 때부터 과수원일을 도우며 꽃들과 대화하고 자연과 친숙하게 자랐다. 집이 가난하여 가정교사를 하면서 학교에 다니느라 몸은 쇠약했지만 학업 성적은 늘 우수했다. 멘델은 가난 때문에 성직자가 되려고 성 토마스교회에 들어갔으나, 신학자로서보다 과학자로서 그의 재능에 주목한 어느 승정의 주선으로 대학 공부를 할 수 있었다. 
대학을 마친 멘델은 수도원으로 돌아와 실과중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그 안에 실험실을 차리고 연구에 몰두했다. 밤낮으로 죽을 고생을 해가며 완두의 교잡실험을 거듭하여 처음으로 ‘생물체에는 유전자가 있어 부모의 형질이 유전 된다’는 사실을 실험으로 증명해냈다. 이러한 멘델의 연구는 이후 유전공학이란 새로운 학문이 열리고 인류 발전을 성큼 앞당기는 계기가 되었다.
장장 8년 동안 3백25번의 실험으로 알아낸 유전법칙을 학계에 발표한 것은 1866년 2월 8일이었다. 생물학사상 진화론만큼이나 중요한 멘델의 유전법칙은 발표 당시 너무나 앞서 생물학자들까지도 이해하지 못했다. 
「식물잡종에 관한 연구」라는 논제로 40분 동안 완두의 형질이 후대에 유전되는 법칙을 열심히 설명했지만 무지한 참석자 대부분은 지루해했고 꾸벅꾸벅 조는 사람도 있었다. 생물학 사상 엄청난 사건이 발표되고 있음에도 관심은커녕 아무런 토론도 없이 끝나버렸다. 불행한 일이었다.
실망한 나머지 멘델의 실험실 문은 굳게 닫혀버렸고, 그의 학설은 그가 죽은 후까지 도서관 구석에서 때가 오기만 기다렸다. 드디어 발표 후 34년이 지난 1900년에 가서야 위대한 발견은 기지개를 폈다.
멘델의 이론을 토대로 드프리스, 코렌스, 체르마크 세 사람이 각기 다른 연구실에서 유전법칙을 발표했는데, 그 내용과 결론이 멘델이 발견해 놓은 내용과 일치했다.
그제야 멘델의 유전법칙은 세인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생물학계에서는 불과 두어 달 사이에 세 명의 생물학자가 같은 내용의 실험결과를 잇달아 발표하자 깜짝놀라 ‘유전법칙이란 무엇인가?’, ‘멘델이 누구인가?’라며 늦게나마 멘델의 위대한 발견에 경탄을 금치 못했다. 
이로써 1900년은 ‘멘델 유전법칙 재발견의 해’가 되었다. 후세 사람들은 멘델의 유전법칙을 우열의 법칙, 분리의 법칙, 독립의 법칙의 세 가지로 정리하였다.
멘델이 제시한 유전자 개념은 그 후 백여 년간 많은 과학자들이 엄청난 열정과 노력을 기울인 결과 최근에 DNA를 규명했고, 그 실체에 대해 거의 완벽한 해석이 가능하게 되었다.
한 사람의 위인이 탄생하려면 많은 장애가 앞을 가로 막은 것처럼 멘델도 생전에 많은 시련을 겪었다. 비엔나 대학에서 공부할 때 생물학에 D학점의 수모를 겪었고, 교사 자격시험에 낙방한 적도 있다. 시험관은 그가‘지식에 있어서 필수적인 명확성과 통찰력이 결핍되었다’고 낙제시켰다. 어리석은 시험관은 멘델의 가장 장점을 가장 단점으로 잘못 본 것이다. 
그의 연구가 현대 유전학에 단초를 제공하는 귀중한 원리가 들어 있었음에도 당시 학계에서 인정받지 못한 결정적인 불운도 뒤따랐다.
그러나 위대한 ‘멘델의 법칙’은 사후에 크게 각광을 받아, 1910년 브륀에는 동상이 서고 그 일대가 ‘멘델광장’이 되어 늦게나마 그의 혼을 달래주었다. 
멘델의 연구는 계획의 치밀성, 실험의 정확성, 자료처리의 탁월성, 논리의 명쾌성 등이 뛰어나 생물학 사상 가장 훌륭한 업적의 하나로 꼽힌다. 그 뒤 모건이 초파리 연구로 유전공학을 더욱 진전시키고, 뮐러가 초파리의 인공 돌연변이에 성공함으로써 멘델은 ‘유전법칙의 선구자’로 생물학사에 길이 남게 되었다.
멘델의 일생을 살펴보면 생물 학자로서의 재능을 발견하고 아낌없이 후원해준 어느 승정은 꼭 만나야 할 사람이었고, 생물학에 D학점을 준 교수, 어리석은 교사자격 시험관과 유전법칙 발표장에 나온 많은 학자는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들이었다. 
멘델은 자연사학회에서 그의 연구가 주목을 받지 못하자 크게 실망하고 연구를 중단하고 말았는데, 만일 멘델의 유전학이 처음부터 우수성을 인정받았다면 인류의 역사는 더 발전했을 것이다. 아마 벌써 코끼리만한 돼지, 호박만한 사과가 나왔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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