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관령은 3월, 40cm의 춘설이 왔다. 매년 겪는 일이지만 서럽기도 하다. 물론 대관령 살바토레정원은 새순이 땅을 뚫고 나오기도 전이니 그리 큰 문제는 없다. 봄을 시샘하는 눈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물론 4월에도 눈이 온다. 어느 해에는 5월 5일 ‘어린이날’까지도 눈이 왔다. 하드니스 존 5a 지역의 특징이다. 심드렁한 봄, 대관령은 이토록 느리지만 최근 기후로는 24절기에 가장 비슷한 지역이다.
4월, 곤충들의 놀이터 개장
변화무쌍한 3월을 지나 4월 남부지방과 중부지방에서는 연일 꽃소식이다. 복수초를 시작으로 매화, 노루귀, 청노루귀, 큰개불알풀, 너도바람꽃, 변산바람꽃, 길마가지나무꽃, 산자고, 영춘화, 수선화, 처녀치마, 얼레지 등이 무한 봄소식을 알리고 있다.
이에 질세라 대관령도 어쨌든 봄의 시작이다. 커다란 눈덩이는 봄의 구애 속에서 비가 내리듯이 녹고, 계절은 꽃이 없어서는 안 될 계절로 이미 들어가고 있다. 어디 보자, 느리게 시작된 봄에도 이제 마음은 유달리 바빠진다.
본격적으로 흙을 일군다. 정원의 흙을 덮고 있었던 묵은 가지들도 제거한다. 심을 나무도 생각한다. 가지치기도 한다. 작은 정원이라 해도 정원에는 구역이 있다. 살바토레 정원도 1에서 15구역까지 내 마음속 이름을 만들어 놓았다. 암석정원에서 가장 기대되는 꽃은 유럽할미꽃이다. 그 사이사이 앵초류 품종들도 나오고 있다. 중정에는 무적함대 같은 우아한 튤립들이 그룹별로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다.
수선화가 무색의 향으로 나를 유혹할 것이고 크로커스, 쉴라, 푸쉬키니아, 호지킨아이리스 등이 봄 정원을 향기로 가득 채우고 있다. 나는 곤충들의 왕국인 정원에서 일하는 정원사이다. 성격이 급한 곤충들은 4월이면 보이기 시작한다. 양지바른 곳에 핀 아이슬란드 양귀비 위로 여치가 봄 향기를 맡고 있다. 나는 정원이라는 왕국에서 일하는 작은 인간 정원사이다. 다양한 벌과 나비들, 개미와 두더지, 크고 작은 곤충들이 정원에서 피땀 흘려 일하는 나의 정원에 선을 넘고 들어와 열심히 수분 매개자 역할을 하고, 자신들의 놀이터에서 밀회도 즐기며 우아하게 봄을 만끽한다.
곤충들은 멋진 피사체이자 친구다. ‘꽃가루 매개자로 벌과 나비만 한 친구가 없다’라는 말이 있다. 벌과 나비는 언제부터 개채 수가 줄고 있지만 정원에서 함께 일을 하는 친구들이기도 하다. 더 더워지면 여름 플록스 위로 산제비나비도 보일 것이다.
Pulsatilla vulgaris
4월에 피는 진달래, 얼레지와 더불어 한국적인 꽃을 꼽으라면 단연 할미꽃이다. 꽃이 진 뒤의 씨방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멋진 노신사의 모습 같기도 하다. 이토록 점잖고 우아한 할미꽃도 여러 종류가 있다. 우리의 자랑 동강할미꽃, 토종할미꽃, 제주에 자생하는 가는잎할미꽃, 연한 분홍꽃이 매력적인 백두산에 자생하는 백두할미꽃이 있다. 이와 더불어 살바토레 정원에는 고혹적으로 무리지어 있는 유럽할미꽃이 있다.
꽃은 매우 소담하며, 할머니의 보라색 스웨터가 생각나는 꽃이다. 흰색도 있는데 4월이면 개화가 기다려지는 꽃이다. 살바토레 정원에서도 척박한 토양의 바위틈에서 잘 자라며 바람이 불고 날씨가 추워질 때는 꽃도 엎드려 자세를 낮추는 꽃이다.
하지만 빛이 좋으면 고개를 하늘로 들고 피는 자신감이 넘치는 꽃이다. 꽃이 피기 전, 유럽할미꽃 꽃덩어리는 흙을 뚫고 올라올 때 목양견 올드 잉글리시 쉽독의 흰털처럼 묘한 감촉을 주기도 한다. 요즘은 다양한 색감의 유럽할미꽃을 볼 수 있다.
Iris reticulata ‘Katharine Hodgkin’
정원을 소유하다 보면 어느 때부터 수집 열풍에 집착한다. 최근에는 덜하지만 그럼에도 신품종이 나오다 보면 계속 종묘사나 꽃시장을 바라보며 우리 정원에 없는 꽃을 찾기도 한다. 정원사는 익살스럽게 더 이상 소유는 없다고 외치기도 하지만 매년 쏟아지는 찬란한 미녀들 앞에서는 배알도 없다. 아담하지만 꽉 찬 살바토레 정원에도 더 이상 심을 곳이 없다 보니 안타깝지만, 신품종의 유혹은 계속된다. 급기야 우리나라 시장을 뒤로 하고 외국 온라인 사이트를 매일 들락날락거리기도 한다. 수입도 안 된, 처음보는 꽃이라도 찾으면 만세를 부르기도 한다.
아이리스(붓꽃)를 좋아한다. 특히 독일 아이리스와 4월에 피는 왜성 아이리스 ‘커서린 호지킨’이라는 품종에 푹 빠져서 구근을 구해 매해 키웠다. 10cm 정도의 키 작은 아이리스인데 대관령에서도 4월경 근사한 하늘색을 뿜어내며 꽃이 없는 정원 한구석에 자리하고 있다. 여름이 되면 잎은 시들고 휴면기에 들어가지만, 존재 자체만으로도 아름다운 꽃이다. 어느 해에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거짓말 아이리스’라 부르기도 했다. 유럽으로 정원 여행을 갔을 때도 하루가 멀다하고 구근 아이리스들을 살펴보기도 했다.
붓꽃(Iris)은 국가표준식물목록 기준으로는 ‘이리스’지만 보통 아이리스로 표기한다. 이리스나 아이리스나 이름도 이름이지만 꽃은 예쁘다. 꽃은 보통 3장의 외화피, 3장의 내화피, 3개의 수술과 3개의 암술로 되어있다.
수염이 있기도 하고 없는 종도 있다. 붓꽃속은 북반구에만 250여 종 가까운 원종이 있다고 한다. 붓꽃속은 6개의 아속(Iris, Limniris, Xiphium, Nephalensis, Scorpiris, Hermodactyloides)으로 구분된다. 아속, 절, 열의 구분은 종의 공통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는 종들로 나누어져 어려운 분류에도 나만의 공부 방법이 된다. Limniris 아속에 속하는 우리 원종 붓꽃인 오대산 전나무 아래 자생하는 무색의 향이 나는 노랑무늬붓꽃(Iris odaesanensis)을 빨리 보고 싶은 5월, 6월은 이렇게 오고 있다.
4월 살바토레정원에서 피는 ‘캐서린 호지킨’ 아이리스를 보니 갑자기 아이리스를 기막히게 그린 모네와 에밀 놀데가 떠오른다. 꽃은 이토록 기억의 예술성을 부여한다. 꽃 하나가 전 세계의 다른 품종들을 찾게 하고 이름을 정확히 보게 하고, 원예서나 책에 나온 전문적인 지식도 습득하게 한다. 그 꽃을 잘 그린 화가들도 알게 되어 꽃과 계절이 주는 설렘을 간직하게 한다. 그렇다. 우리는 4월에 있다. 봄 속에 있다.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하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