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음성군 고추명인 남안우 대표
지난 6월호에서는 봄의 늦서리를 견딘 묘들이 하우스와 노지에 뿌리를 내리는 생동감 넘치는 현장을 담았다. 7월 중순, 본지는 여름의 한가운데 서 있는 충북 음성을 다시 찾았다. 하우스에서는 전날인 7월 15일 막 첫 수확의 물꼬를 텄고, 넓게 펼쳐진 노지 밭에서는 본격적인 생육과 과실의 비대가 한창이었다. 같은 음성의 땅, 같은 농가의 손에서 나고 자란 고추가 재배 환경에 따라 이렇게까지 전혀 다른 얼굴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번 현장 취재를 통해 생생히 확인할 수 있었다.
현장에 도착했을 때 남안우 대표는 하우스 안에서 이른 아침부터 방제 상태를 정밀 점검하고 있었다. 잎 뒷면을 돋보기로 들여다보듯 살피는 그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잎 뒷면에 한두 마리씩 보이는 총채벌레, 그리고 응애 피해로 추정되는 마른 잎과 쪼글쪼글해진 잎들이 뒤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시중에 나와 있는 좋은 약제란 약제는 다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정확한 원인을 잡기가 어렵네요. 올해 하우스에 처음 시도해 본 품종이라 그런 건지, 생육 밸런스가 제대로 잡히지 않습니다.”
남 대표의 방제 주기는 3~4일 간격으로 매우 촘촘하다. 보통의 상황이라면 해충이 사멸하거나 밀도가 현저히 줄어들어야 정상이다. 그러나 방제를 하고 나면 2~3일 정도 잠시 잦아드는 듯하다가도 이내 다시 해충이 발생하고 있다. 통상 총채벌레나 응애 피해가 심각한 밭은 잎 뒷면이 벌레로 “바글바글”할 정도로 밀도가 폭발하는데, 지금 하우스는 눈에 보이는 벌레 밀도가 그리 높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고추나무 전체가 힘을 쓰지 못하고 피해 증상이 지속된다는 점이 그를 더욱 답답하게 만들고 있었다.남 대표가 진단하는 근본적인 원인은 '고온 축적'과 '품종 특성'의 악순환이다. “날씨가 뜨거워지면 땅속 뿌리부터 온도가 높아지면서 생육 환경이 나빠지고, 이렇게 약해진 고추나무에는 해충이 더 쉽게 달라붙어 피해를 키우는 법이지요.”
올해 하우스에 처음 도입한 조생종 품종의 생리적 특성도 겹쳤다. 조생종은 초반 성장이 빨라 초기 시장 선점에는 유리하지만, 환경 변화에 견디는 저항력이 상대적으로 약하다는 것이 남 대표의 설명이다. “추위에 약한 품종은 고온에도 약하다”는 그의 말처럼, 조생종 특유의 여린 체질이 폭염 속에서 고스란히 약점으로 드러난 셈이다.
7월 15일 시작된 첫 수확은 예년보다 2~3일가량 늦어졌을 뿐만 아니라, 수확된 과실의 품질도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고온으로 인한 칼슘 흡수 장애로 배꼽썩음병(끝썩음병) 증상을 보이는 과실들이 눈에 띄었다. 착과 초기 수정이 이루어지던 시점부터 하우스 내부 환경이 열악했던 것이 원인으로, 이러한 과실들은 상품성이 없어 밭에서 즉시 폐기해야 하는 아쉬움을 남겼다.
빗물 한 방울과 환풍기의 딜레마
하우스 내부의 열기를 식혀줄 환풍기나 차광막 시설이 보완되지 않은 이유에 대해 묻자, 남 대표는 중소규모 고추 시설하우스가 안고 있는 오랜 기술적 딜레마를 털어놓았다.
“기존 비닐을 뚫고 환풍기를 설치하는 방식은 구조적인 한계가 있습니다. 여름철 강풍을 동반한 비바람이 치면 그 뚫린 구멍 사이로 빗물이 하우스 내부로 흘러들어가게 됩니다. 시설 하우스 안에서 고추가 빗물을 한 번 맞는 것은 노지에서 비를 맞는 것보다 탄저병 전파에 훨씬 더 치명적입니다.”
환풍기 설치 여부는 해마다 조금씩 달랐다는 것이 남 대표의 설명이다. 이전에 환풍기를 달아본 적도 있지만, 최근 몇 년은 설치하지 않고도 무난히 작기를 마쳐 올해 역시 기존 방식을 유지했다. 문제는 예상을 벗어난 기후 패턴이었다. 6월 초·중순까지만 해도 일주일에서 열흘 간격으로 단비가 꾸준히 내려 대풍을 기대할 정도로 적정한 조건이었으나, 7월 들어 온도가 급상승하고 습도까지 더해지면서 시들음병 등 병해충 발생 압력이 커졌다.
결국 품종 전환으로 고온에 버티는 힘이 약해진 상태에서, 시설 환기 보완이 이뤄지지 못한 틈새가 겹치며 피해가 커진 것이다. 남 대표는 “내년에는 그물망 시설을 좀 더 보강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같은 밭, 다른 얼굴
하우스의 답답한 상황과 달리, 밖으로 나와 펼쳐진 노지 고추밭의 풍경은 확연히 대조적이었다. 약 4,800평(12마끼) 규모의 노지 밭에 심겨진 고추들은 청량한 초록빛을 띠며 왕성한 세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가장 먼저 살핀 매운 품종 ‘명장칼탄’ 구역은 마디마다 굵은 과실이 5개씩 맺혀 있었다. 보통 노지에서는 1m 50cm 길이의 지주목을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이곳은 생육이 왕성해 1m 80cm짜리 장대 말뚝을 세워둔 상태였다.“밑거름 시비와 올봄·여름의 날씨 삼박자가 아주 딱 맞아떨어졌습니다.” 남 대표는 지금 성장 속도와 세력이라면 8~9월 끝물까지 지주목 끝까지 다 차오를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하우스보다 노지의 작황이 뛰어난 이유를 묻는 취재진에게, 남 대표는 특정 원인 하나로 딱 잘라 말하기보다 여러 요인이 겹친 결과라고 답했다. 조생종 품종의 약한 체질, 하우스 내부의 고온 축적, 시설 보완이 미흡했던 점이 함께 작용했다는 것이다. 그는 최근 경북 지역을 직접 다녀오고 충남 지역 작황도 살펴보았다며, “다녀본 결과 현재 음성 지역의 노지 고추 작황이 전국에서 단연 으뜸”이라고 음성 고추 재배 환경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냈다.
이어진 노지 다른 구역에서는 소비 트렌드 변화에 맞춘 안 매운 품종들의 비교 재배가 한창이었다. 조생종인 ‘칼탄킹’과 중생종인 ‘순돌이와 대근이’가 그 주인공이다. 동일한 순한 맛 계열임에도 조생종과 중생종 간에 과실이 착색되어 붉어지는 타이밍이 확연히 달라 품종 관찰의 재미를 더했다. 최근 매운맛 선호도가 줄어들고 순하고 담백한 고추를 찾는 소비자 및 직거래 주문이 늘어남에 따라 안 매운 고추의 재배 비중을 대폭 늘렸다는 것이 현장의 전언이다.
"승부는 끝물에 갈린다"
하우스의 초반 작황이 부진하다고 해서 남 대표는 결코 손을 놓거나 방제를 소홀히 하지 않는다. 수십 년간 흙을 만지며 터득한 그만의 견고한 경험칙이 있기 때문이다.
“농사를 지어보면 초반 첫물·두물 고추가 너무 좋으면 끝물에 가서 약해집니다. 반대로 초반에 세력이 눌려 부진하면, 후반부에 기운과 영양분이 한 번에 쏠리면서 끝물에 생각지도 못한 크고 매끄러운 과실들이 나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는 지금의 하우스 부진을 '실패'가 아닌 '후반전을 위한 조정기'로 정의한다. 영양제와 꾸준한 방제로 세력을 유지시키며, 후반부 수확에서의 반전을 기대하고 있다.
올해 전체적인 기후 여건에 대해서도 그는 긍정적인 시각을 유지했다. 장마가 길게 늘어지지 않았고 이틀 연속 폭우가 쏟아진 날도 드물어 고추 생육에 기본적인 자연조건은 나쁘지 않다는 평가다. 다만, 고추 농사의 최대 적이라 불리는 '탄저병' 방제만큼은 타협이 없다. 비가 오기 전 예방약제를 살포하고, 비가 그친 직후 즉시 2차 방제를 실시하는 '전후 이중 방제'가 고추 농사의 성패를 가르는 열쇠라고 강조했다.
“앞으로의 기상예보를 봐도 일주일씩 장마가 이어지는 악조건은 없습니다. 하루이틀 비가 내린 뒤 사나흘 해가 뜨는 날씨가 반복되어 준다면, 지금의 고비만 잘 넘겼을 때 올해 전체 작황은 여느 해보다 풍성한 결실을 맺을 것입니다.”
다음 취재는 하우스 고추가 본격적인 후기 끝물에 접어들고, 태양열과 건조기를 통한 본격적인 출하가 시작될 무렵이다. 초반의 부진을 딛고 끝물에서 반전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 음성 고추명인 남안우 대표의 여름은 이제 절반을 지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