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시 원 지피식물원 황수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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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시 원 지피식물원 황수자 원장
  • 월간원예
  • 승인 2009.07.31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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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라는 훈장의 의미

“땀과 열정으로 일군 최초라는 수식어”

 

황수자 원장은 28년 전 국내 최초로 야생화를 재배하기 시작했다.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을 가장 먼저 헤쳐 나가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 세상에 또 있을까. 남다른 혜안으로 야생화의 가치를 찾아내 한발 한발 내딛어온 값진 땀방울이 있었기에 그녀는 현재 야생화계의 대모로 통한다.

 

야생화계의 대모, 야생화 여인
황수자 원장은 경기도 고양시 일대에 약 11만 5700㎡의 야생화 농장을 운영하고 있다. 야생화계의 대모, 야생화 여인 등 황 원장의 별명은 야생화를 떼어 놓고는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그녀와 야생화의 인연은 깊고도 진하다. 그녀가 야생화와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1981년, 그 시절 국내에서 야생화의 입지는 불모지나 다름없었다. 황수자 원장은 평소 알고 지내던 교수님들의 조언을 받아 야생화를 비롯한 지피식물에 관심을 갖게 됐고, 지인에게 돈 100만원을 빌려 야생화 재배를 시작하게 됐다.
“야생화는 적은 돈으로 많은 효과를 누릴 수 있는 식물이에요. 큰 정원에 나무나 잔디만 심어 놓는다면 얼마나 재미가 없겠어요. 여자들이 기초화장만 하면 좀 밋밋하듯이 야생화도 일종의 색조화장이라 생각하면 쉬울 것 같아요. 작은 식물이지만 그 장소의 포인트가 될 수 있는 역할을 바로 우리 야생화가 하는 것이지요.”

 

최초라는 훈장의 의미
앞서 전했듯이 황수자 원장은 국내 최초로 야생화를 재배한 선구자다. 이런 황 원장의 선구자적 자질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 그녀가 고등학교 재학 중이던 시절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학교 내 온실을 관리하는 당번을 하고 싶었는데 개교 이래 남학생들이 맡아서 하던 일이라고 절대로 안 시켜주더라고요. 선생님께 한 달을 졸라서 제가 온실을 관리하게 되었어요. 나중에 알게 된 일인데 저 이후로는 줄곧 여학생이 온실 당번을 하게 되었다고 해요.”
그렇게 식물과 친해진 계기를 만들었던 그녀는 5년간의 여군 생활을 정리하고, 결혼 후 야생화 농장을 직접 경영하기에 이르렀다.
“초기에는 정말 어려웠어요. 비닐하우스를 짓고, 야심차게 야생화를 재배하기 시작했는데 사가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요. 그렇다고 바로 포기할 수는 없잖아요. 화장품 외판원부터 식당 종업원까지 생계를 꾸리기 위해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이를 악물었죠.”
계속되는 어려움 속에 그녀에게도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맥문동, 원추리 등 우리 야생화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높아졌고, 야생화가 조경용 소재로 조금씩 각광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동안 야생화를 키워 이룬 수입이라고는 한 푼도 없었는데 1987년 한강관리사업소에 우리나라 최초로 야생화를 납품해 1억원의 수익을 올렸어요.”
지금은 그 몇 배에 해당하는 수익을 올리고 있지만 그때의 감흥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는 황 원장은 최초라는 자부심은 가슴 속에 늘 품고 있되 자만하지 않는 최고가 되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다.

>>2009년 7월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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